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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포스팅에 사용 된 이미지는 Daum 출처이며, 역사적인 기록과 인터넷 정보로 작성 된 것임을 밝힙니다.

 

 

▲  1592년 4월 왜의 풍신수길이 일으킨 전쟁 "임진왜란"

 

 

1. 당시의 상황

 

조선시대에 있어 가장 큰 전쟁 중 하나로 어찌보면 애초에 막을 수 있었던 안타까운 전쟁이기도 하다.

120년간의 전국시대를 막 내리게 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는 각 지역의 반발 세력들을 잠재우기 위해 공동의 적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명나라를 치기 위해 지나갈 터이니, 길을 터달라"는 말을 한다. 이에 조선은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로 구성 된 통신사를 왜에 파견, 진상을 알아보기로 한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 (풍신수길)

 

 

정사 황윤길은 서인, 부사 김성일은 동인으로 정치적으로는 대립 관계에 있던 인물들이다.

통신사 행렬은 한양을 떠나 대마도를 거쳐 왜로 진입해야 했는데, 당시 대마도는 왜나 조선의 영토가 아닌 중립 독립 자치구 형태였지만 사실상 조선 국왕의 지시를 받는 곳이었다.

 

하지만 조선 통신사 일행이 당도하였음에도 대마도주가 가마에 탄 채, 통신사의 앞까지 다가오자 정사 황윤길은 "오랑캐가 무슨 예의를 알겠습니까?"라며 웃어넘겼지만, 부사 김성일은 "감히 주상 전하의 명을 받들어 대리인의 신분으로 온 것이거늘, 이 무슨 행패인가?"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에 화들짝 놀란 대마도주는 황급히 꼬리를 내리며 극진한 대접을 했다고 전한다.

 

 

 

2. 임진왜란 직전의 상황 : 엇갈린 보고

 

▲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보고 ( 출처: KBS드라마 징비록 중 )

 

 

풍신수길을 만나고 돌아 온 통신사의 보고는 상반되었다.

먼저 통신정사 황윤길은 "풍신수길은 눈빛이 반짝이며, 담과 지략을 갖춘 인물로 쳐들어 올 것"이라 주장하였고 부사 김성일은 "그는 쥐의 형상을 한 인물로 그리 두려워 할 상은 못 된다."라고 주장하였다. 상반 된 보고에 선조를 비롯한 신하들이 동요하자 함께 갔던 허성이 황윤길의 주장에 힘을 실어 주었다. ( 허성은 동인으로 이후 동인들에게 심한 견제를 받게 된다. )

 

결국 선조는 부사 김성일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1년 후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된다.

 

 

 

3. 정말 부사 김성일은 정치적 이유때문에 반대 된 의견을 내세운 것일까?

 

 

▲  학봉 김성일 (1538~1593 )

 

 

결과적으로 임진왜란이 실제로 발발해 학봉 김성일은 "천하의 죽일 놈"이 되었지만, 사실 그는 무조건 부인설을 주장한 것이 아니였다고 한다.

더불어 "조정의 호랑이"라 불릴만큼 충직하고 곧은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그가 나주목사로 있을 때 백성들의 민심을 두루 살피고, 어사가 술에 잔뜩 취해 밤늦게 관아로 찾아오자 이를 크게 꾸짖으며 문조차 열어주지 않았다는 일화는 유명한 이야기.

어디 그 뿐일까? 지금으로 치면 국정 비리, 권력 비리를 과감하게 척결한 장본인이 바로 학봉 김성일이다.

 

 

이야기에 앞서 당시 조선의 상황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당시 조선은 선조 임금의 통치 아래에 있었던 시기로 사실 선조는 굉장히 무능한 군주였다. 때문에 정치적 당파 싸움이 성행함은 물론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던 시기라고 봐도 무방했을 시기였다.

 

이에 율곡 이이 선생이 "현재의 썩어빠진 군율과 제도, 인식으로는 대란에 대비하기 어렵다. 수도권에 2만, 각 도에 1만의 병력을 배치시켜 대란에 대비해야 한다. "는 <10만 양병설 >을 선조에게 건의하지만 대신들의 강한 반발로 무산된다.

이후 왜란이 발발하자 유성룡은 "우리가 모두가 죄인, 왜 그때 그 뜻을 따르지 않았을까?"하고 통곡했다고 전한다. 그만큼 당시 조정과 온 국가 기관은 태평성대에 취해 제대로 된 기능조차 발휘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쳐들어오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민심을 잃으면 모든 것이 끝이니 민심부터 챙기자는 뜻

 

후세는 당시 "부사 김성일이 동인 출신이라 서인인 정사 황윤길의 주장에 무조건적인 반대 의견을 내세운 것"이라 평하고 있다. 더불어 실제로 왜란이 발발했으니 아마 그에 대한 힘이 더욱 실렸을 것이라는 건 인정한다.

다만 당시 조선의 사회와 학봉 김성일의 성품,정치관 등을 본다면 그는 "부인설"을 주장했다고만 보긴 어렵다.

 

실제로 유성룡은 그 일이 있은 직후, 바로 김성일을 찾아가 "정말 조짐이 없었나? 만약에라도 화가 미치면 어쩌려고 그러는가?"라고 묻자, 김성일은 "제가 어찌 대란의 진정 여부를 확답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지금의 상태로는 아무리 우수한 무기와 성으로 대비한다고 해도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민심을 수습하고 그 후 대비해야 된다고 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말인즉 정사 황윤길이 당장이라도 전란이 일어날 것처럼 말을 하니, 가뜩이나 흉흉한 민심이 등을 돌리면 끝장은 당연한 것.

따라서 대비는 하되, 민심부터 챙기자는 의견이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훗날 책임을 추궁하는 자리에서 이항복(서인출신)이 김성일을 변호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당시 김성일을 비롯, 조정 모두가 왜의 침입에 간과했던 건 사실일 것, 하지만 당색이나 생각이 짧아 그런 것은 아니다.

 

김성일은 실제로 전란이 발발하자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미 그 역시도 언젠간 왜구의 침입을 예견했던 터.

의병장들을 규합하여 전공을 세우도록 하고, 적군의 공격 경로를 예측해 방어에 공을 세우기도 했다고 한다.

더욱이 통신사로 왜에 갔을 때에도 다들 황윤길을 비롯한 통신사 일행에게는 업신여기거나 대수롭지 않게 대했어도 김성일에게만큼은 풍신수길조차도 대면하길 꺼려했다고 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라는 평가는 동인,서인 모두 동일하다.

따라서 김성일이 황윤길과는 다른 판단을 했던 것도 어찌보면 당연하고 가능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4.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도 뛰어난 학자이자 훌륭한 성품의 소유자. 

 

난 의성 김씨 집안의 사람이 아니다. ( 나는 이씨이다. )

따라서 굳이 남의 집안 선조를 욕할 이유도 없지만, 두둔할 이유도 내겐 없다. 내가 이 글을 포스팅하는 이유는 - 전란이 발발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역사적 위인을 폄하해서는 안된다는 이유에서였다.

" 그런 안일한 주장때문에 수 만명이 죽고, 국토가 유린당했는데 무슨 소리냐?"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사실 왜구의 침입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였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방어 체계와 대비를 못한 당시 조정의 탓이지, 일개 통신부사만의 잘못은 아니라는 뜻이다.

 

더불어 당시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이 무시당하면서 이미 조선은 왜구의 상대가 안됨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나마 신립,이순신 등 뛰어난 장수와 여러 의병장들의 활약으로 극복한 것일 뿐. 설령 김성일이 "침략설"을 주장했더라도 조선은 전란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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