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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포스팅은 개인적인 의견을 작성한 것으로 특정 국가 비방, 비난 등의 의도가 없음을 밝힙니다.

 

 

내가 처음 중국이란 나라는 갔을 때가 아마도 2002년이었을 것이다.

원래 처음에는 단순히 배낭여행식이었지만 당시 중국어와 중국인들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급부상하는 중국 시장을 배워둬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던 터라 나는 중국에서 거주해 볼 것을 결심했었다.

 

물론 초반에는 어려움도 많았다. 중국어도 하나도 몰랐고 아는 지인도 없었다.

젊은 혈기에 무작정 건너간 중국은 따뜻하고 정겨운 곳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날 위협하는 무서운 곳이기도 했다.

물론 그래도 한국에서 건너 온 한인 이민 초기 분들이 따뜻하게 조언이나 식사를 제공해 주어서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었다.

 

▲ 북경 왕징의 "한국성"건물 ( 출처 : 한겨레 )

 

그때만 해도 한국인들에게 중국의 기회의 땅이자 특권 의식을 누릴 수 있는 땅이기도 했다. IMF를 슬기롭게(?)극복하고 건너 온 이민자들과 유학생들에게는 말이다. 물론 그 중에는 정말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노력하는 한국인들도 많았지만 대부분은 부모의 돈으로 흥청망청 인생을 허비하다 못해 망나니 짓을 일삼는 한심한 인생들도 많았다.

 

" 100달러를 우습게 아는 사람은 한국인 밖에는 없을 것 "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당시 100달러는 중국 돈으로 약 830~840위안 정도를 줬었다. 친구들과 술집에 가서 거나하게 놀면 그야말로 하루도 안돼 날릴 수 있는 돈이기도 했다. ( 더 나올 수도 있지만... )

물론 아껴쓰면 1개월은 족히 쓸 수 있는 돈이기도 했다.

나는 한국인 유학생들도 가까이 지냈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뒀고 외국인들과 중국인들 위주로 지인들을 사귀었다.

 

그래서 아파트는 고급 아파트에서 지냈지만 식사는 중국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중국인 거주 지역에 놀러가 같이 마작도 하고 술도 마시면서 지냈다. 만두와 국만 먹으면 3위안 정도면 한 끼가 해결됐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물론 가끔은 나도 사람인지라 미친 척 돈을 쓴 날도 있긴 했었지만 말이다.

 

▲ 북경 왕징의 모습 ( 출처 : 한겨레 )

 

◆ 사드 문제가 중국 진출과 중국 정착의 실패? 중국인들을 무시하는 인식부터가 문제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한인들의 중국인들을 무시하는 인식은 대단했다. "더럽다." / "사기꾼이다." 등으로 무시해댔다.

월 800위안~1,000위안 정도 급여를 지급하지만 그 외에는 철저한 무시와 끊임없는 일을 지시했다. 

중국은 대단한 나라이다. 수 없는 전쟁과 해외의 침략에도 땅 한번 뺏기지 않고 지켜낸 것을 보면 말이다.

미국은 이미 70년대부터 "차이나 포비아"(중국 공포증)을 선언했을 정도로 중국은 가능성을 잠재한 나라였다. 

 

중국인들은 가난하든 부자이든 조국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감정이 다혈질적이지만 부자들은 포커 페이스가 완벽하다 할 정도로 냉정하다. 그들에게 말 몇 마디로 환심을 살 수는 없다. 끊임없이 대화하고 우호적인 모습, 그리고 신뢰를 쌓아야만 그들은 조금의 경계를 허문다. 내가 한때 자금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을 때 중국 친구들은 내게 매일같이 식사와 조금의 경제적 지원을 해주었다.

더불어 갚지 않아도 된다고도 했다. 이유인즉 "우리는 친구이기 때문"이었다. ( 아직도 그들과 교류를 하고 있다. )

 

언론은 마치 "사드"가 중국인들이 한인들을 배척하고 공격하는 이유라고 한다. 물론 일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본인들을 보면 무조건 때려 죽이려고 하는가? 그렇게나 싫은 일본인인데 말이다.

아니지 않은가? 사드는 아주 작은 요인일 뿐이다. 그 동안 한인들이 보여 준 행태가 중국인들에게는 우호가 아닌 적이었을 뿐이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살펴보길 바란다. 진정 이웃의 중국인들과 교류를 하며 친구처럼 지냈는가를 말이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름 아래 무시하고 폐쇄적으로 살지 않았는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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