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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6.25 한국 전쟁이 발발했던 날입니다.

    단순히 노는 날, 휴일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목숨바쳐 싸우던 순국선열들의 넋을 기리는 날로 경건히 보냈으면 합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04시경.

일제히 남측으로 포탄이 발사되면서 3년 1개월간의 긴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한국인들에겐 일제 강점기의 독립 직후, 세계인들에겐 2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의 일이었다.

북측 지도자 김일성의 지시로 만반의 전쟁 준비를 했던 북측은 소련 스탈린의 군수물자의 지원으로 막강한 화력 뿜어대며 일제히 남하했다.

발발 3일만에 남측의 수도 서울 함락, 아무리 대비 태세가 갖춰지지 않은 상황이었다지만 당시 남측의 군사력은 거의 경비대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렇다 할 반격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미군이 철수한 터라 한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남하해야 했다.

 

국민들의 뜻과는 반대로 소위 지도자들이란 것들의 이념 대립은 전쟁이란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1. 전쟁의 시작 : 신탁통치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중이던 1943년 11월 27일 미국·영국·중국 등 3개국의 정상이 참석한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일본 예속은 부당하다고 인정하고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합의했으며, 1945년 2월 얄타에서 개최된 미국·영국·소련 등 3개국의 정상회담에서는 일본이 항복한 후 한반도는 미국·영국·중국·소련 등 4개국에 의한 일정 기간의 신탁통치를 거친 후 독립시키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진주만의 아픔이 있어서인지 이때만 해도 미국은 일본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그래서 소련에게 조기 참전을 요청한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 러일 전쟁의 패배로 인한 상처가 있던 소련이 참전을 지연했고 미국은 원자폭탄을 투하해버린다. 투하 2일이 지나서야 소련은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외치고 진격한다. 이미 패색이 짙고 전의를 상실한 일본군은 소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38도선을 기준으로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일정기간 신탁통치에 들어가는 순간이다.

물론 이때만 해도 그 누구도 남과 북이 긴 세월 전쟁과 분단을 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김일성은 남침에 대한 준비를 오래 전부터 구상해왔고 그래서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을 수 차례 방문했었다.

스탈린은 이런 저런 핑계로 전쟁을 반대했다. 2차 대전이 끝난지도 얼마 안됐고 미국의 지원이 내심 두려웠던 것.

하지만 끈질긴 김일성의 요청에 결국 스탈린은 하나의 제안을 한다. "모택동이 참전한다면 돕겠다."

곧장 중공을 방문한 김일성을 모택동을 만나 협상을 하고 모택동은 이에 동의한다. 루머이지만 당시 중공의 계획은 그러했다고 한다.

 

태평양 교두보가 절실했던 중공은 사실 한반도가 매우 필요했던 상황, 그리고 어려운 한자보다는 간단한 한글이 매력적이었기에 북측이 한반도를 점령하면 이를 빼앗고 한글을 자국어로 삼을 계획이었다는 것. ( 루머라서 사실 확인은 불가합니다. ^^;; )

스탈린, 모택동의 동의를 얻은 김일성은 바로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 미국이 참전하기 전에 끝내겠다!! "는 목표 아래.

 

▲ 피난길에 오르는 피난민들 (출처: 한국전쟁사진)

 

2. 3년1개월의 긴 전쟁 : 독립전쟁의 명장들이 왔음에도 이를 무시한 군부

 

의정부가 함락되기 직전인 6월26일 오전 10시 서울 국방부 청사로 역전의 노장들이 모여들었다. 청산리 전투의 주인공이자 광복군 참모장과 초대 국방부장관을 지낸 이범석 장군, 광복군 총사령관이자 대한민국 무임소장관을 역임한 이청천 장군, 광복군 참모장을 지내고 현역 육군 소장이었던 김홍일 장군은 하나같이 무거운 표정으로 국방부로 들어섰다. 

그러나 당시 참모총장은 이들의 의견을 듣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데 주력했다. 조국의 불씨가 꺼지는 마당에서도 결국 자신의 입지를 먼저 생각하는 부족한 군인이었다. "한강을 경계로 지연전선을 구축해 방어하자"는 독립군 명장들의 발언을 묵살했다고 전한다.

 

결국 3일만에 서울 함락. 군 지휘부 남하, 리승만 대통령 도주...안일하고 무책임한 지도부의 무능으로 일제 강점이라는 치하를 겪고도 당시 그들은 또 그러했다. ( 이래서 한국인들은 안된다고 하나 보다. )

국군과 연합군은 계속 뒤로 후퇴, 결국 낙동강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최후의 일전을 결심한다.

방어선이 뚫리면 바로 부산으로 진격할 수 있어 사실상 전쟁은 패배하게 되는 것.

 

 

▲ 교과서에도 자주 등장한 대동강 다리를 건너는 피난민들 (출처: 한국전쟁사진)

 

 3. 반격, 인천상륙작전 : 맥아더의 뚝심인가? 명예를 위한 욕심인가?

 

지금까지도 말이 많은 작전이다. 당시 맥아더 장군은 워싱턴으로부터 하지말라는 지시를 받는다.

그만큼 위험이 높은 작전이었을 것이다. 결국 맥아더는 반대적인 주장에도 불구, 이를 강행하고 서울 탈환은 물론 전세 역전의 교두보를 마련한다. 그리고 휴전 후 그는 불명예적인 일들을 겪게 된다.

 

압록강까지 올라간 연합군은 곧 종전과 함께 한반도 전역에 민주화를 실현하게 된다는 기쁨에 젖어있었다.

하지만 모택동은 중공군을 전격 투입시킨다. 김일성과의 약속대로...

끝없이 밀고 내려오는 인해전술 앞에 아연질색한 연합군은 다시 후퇴를 하고...결국 38선 인근에서 뺏고 뺏는 공방전을 펼친다.

 

 

▲ 인민군 포로들 (출처: 한국전쟁사진)

 

▲ 전쟁 중에도 국민들의 삶은 그대로 (출처: 한국전쟁사진)

 

▲ 가족을 잃은 슬픔은 무엇에 비할까? (출처: 한국전쟁사진)

 

전쟁은 국민들에게도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주었다.

남편,아들을 군에 보내야 했고 반공분자 색출이란 명목 아래 배급받은 자들은 모두 빨갱이로 취급되어 사살되었다.

공산주의든, 민주주의든 사실 국민들의 삶에 무슨 큰 대수였을까?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국민들은 그저 희생될 뿐.

▲ 휴전 협상 조인식 (출처: 한국전쟁사진)

 

4. 휴전 그리고 분단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소위 지도층들의 생각은 이미 사실상 종전에 맞춰져있었다.

김일성 역시 예상했던 속전속결을 완수하지 못해 입지가 많이 줄어든 상황에서 계속 전쟁을 지속할 수는 없었다.

소련이나 중공,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 측 역시 더 이상의 전쟁은 무의미하다는 판단을 내린 상황. 하지만 그 누구도 먼저 종전을 말하진 않는다. 결국 "잠시 쉬자."는 차원에서 휴전이 협상되었다. 그리고 67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우리는 휴전 상태이다.

 

 

▲ 육탄10용사,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편하게 살 수 있었다. (출처: 한국전쟁사진)

 

한국전쟁에서는 많은 영웅들과 또 희생을 하신 선열들이 계시지만 육탄10용사들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인민군의 토치카 앞에 속수무책이던 한국군은 결국 폭탄을 들고 맨 몸으로 돌진해 적의 화력을 무력화 할 지원자를 모집하는데 이때 지원한 분들이 바로 <육탄10용사>이다. 나라를 위해, 가족을 위해, 그리고 전우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이들.

어찌 이 분들의 희생을 잊을 수 있을까?

▲ 연필 대신 총을...나라 구하겠다고 일어선 학도의용군들 (출처: 한국전쟁사진)

 

한국 전쟁 당시 동원 된 학도의용군은 총 27,800여명.

성인들조차 징집을 회피하던 그 시절, 나라를 잃으면 학업이 무슨 소용이냐며 그들은 전쟁에 참전했다.

사실 말이 좋아 참전이지, 사실상 학도의용군은 소위 총알받이 격으로 소모되었지 않았나? 제대로 된 훈련도 없이 최소한의 탄약과 화기만을 지급받은 채 전선에 투입 된....잊어선 안되겠다.

 

 

 

휴전 67년이 흘렀다.

아직도 북에서 생존했는지 모를 포로 가 된 분들도, 또 참전했지만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국가 유공자는 커녕 제대로 인정조차 못 받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며칠 전에는 연평해전에 참전한 군인이 콜라 하나를 훔치다 걸려 재판까지 회부되었다는 기사까지 나왔다.

위기 앞에선 나라 위해 나서달라고 애원하면서도 정작 위기가 지나면 "기록이 없다.","예산이 없다."라며 희생조차 비웃어대는 이 나라 정권들은 대체 누구를 위한 정권인지 모르겠다.

 

국방의 의무는 국민 4대 의무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의원들 중 그리고 그 자제들 중 군대에 갔다 온 이들은 몇이나 될까?

국민의 의무조차 지지 않은 그들이 나랏일 하겠다고 나서니...그 나라가 과연 나라를 위해 희생한 그들의 아픔과 의생을 제대로 알아나 줄까?

 

 

오늘은 그저 빨간 날, 쉬는 날이 아닙니다.

물론 그 당시를 살아보지 않아 자세한 역사와 사실까지는 모른다 하더라도 최소한 나라 위해 희생한 선열들에게 고마운 감사의 마음 정도는 가져야 할 날이 아닐까 합니다.

 

고맙습니다. 편히 살 수 있게 해주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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